"10시간? 껌인데?"
1년 전부터 생각했던 버킷리스트가 있다.
군대에서 전역하는 날, 집까지 걸어가고 싶다.
오랜 기간 군대에서 웅크려있다가 자유를 얻은 전역일은 얼마나 기쁠까? 기쁨을 최대한 격렬히, 그리고 오래 누리고 싶다.
그런 나에게, <걷는 남자, 하정우>라는 책은 큰 감동이었다. 배우 하정우 씨는 정말 걷기에 진심이다. 매일 2만보는 걷는데, 그 습관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한다. 이거구나 싶었다. 전역일에는 꼭 부대에서 집까지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전역이 5개월 남은 지금, 곧 꿈을 실현할 때다. 그러나 정말 할 수 있을지 겁이 난다. 전역할 때쯤이면, 1년 중 가장 더운 시기이다. 그 더운 날씨에, 짐을 들고 오랫동안 걸어가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부대에서 집까지 10시간 가까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더 절망적이었다.
계속 의구심만 들었을 때, 자신을 시험해볼 기회가 생겼다. 4월에 휴가를 나오는데, 본가인 인천에서 약속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한도전 프로젝트의 한 편을 이걸로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할머니댁에 들려, 옷을 갈아입고, 인천까지 무작정 걸어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정도면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 10시간도 아닌 7시간이다.
2. 군복도 아닌 편한 사복이고, 짐도 서울에 다 내려놓았다.
3. 가장 날씨가 좋은 봄이었다.
전역날 챌린지의 축소판이다. 이걸 한번 해보면, 10시간 걷기는 어떤 느낌일지 가늠할 수 있겠다.
그렇게 서울 영등포구에서 출발하였다. 오후 4시였다.
원래 계획은 오전 10시쯤 출발이었으나, 급한 사정이 생겨 늦게 출발하였다. 오히려 가장 더운 시간대를 피하게 되어 날씨가 좋았다. 하늘이 너무 맑아, 출발하며 사진을 찍었다.
영등포의 끝자락에서 사진을 한장 더 찍었다.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평일 오후의 영등포는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아이들은 하교 후에 무리 지어 뛰어다니고 있었다. 할머님과 할아버님께서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다니고 계셨다.
아직은 다리가 아프다는 느낌보다는 새로운 길을 가는 기대감이 더 큰 상태이다.
처음으로 다리를 넘었다. 다리를 넘을 때마다 한 행정구역을 넘는 듯 해서 한 스테이지를 해결한 기분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굉장히 큰 역이 있었다. 신도림 역이다.
신도림역 뒤에는 큰 백화점과 넓은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송도신도시 분위기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닌다. 다들 너무나도 바빠 보인다.
문래동에서는 내가 가장 바쁜 사람이었는데, 신도림역에서는 내가 가장 한량이다. 신도림역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챌린지도 까먹고 발걸음이 닿는 대로 이곳저곳 구경하였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슬슬 다리가 아프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로구에 있는 1호선 노선을 따라 걸었다. 구로역, 구일역, 개봉역, 오류동역을 지나왔다.
1호선을 따라 걸으면서 체력이 완전히 바닥났다. 슬슬 입이 바짝 마르고, 저녁 먹을 시간이 돼서 배고팠다. 오류동을 넘어갈 때 쯤,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힘드니까, 머릿속에서 계속 비상신호를 보냈다.
뭐하러 걸어온다고 미련한 짓을 기획했을까
이정도 했으면 많이 걸었지
포기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심해질 때쯤, 잠시 쉴만한 곳이 보였다. 작은 버스정류장이었다.
사람 없는 넓은 도로의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쉬었다. 첫 휴식이라 너무나도 달콤했다. 앉아서 쉬다보니, 내 모습이 웃겼다. 차만 쌩쌩 지나가는 작은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힘들어서 헥헥 대고 있다.
건너편에 멋진 인테리어의 카페가 눈에 띄었다.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전역 날에는 꼭 저길 방문하리.
이대로 가면, 밤 12시에 집 도착이다. 무엇보다도, 너무 지쳐서 집까지 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마음 속 깊이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정도에서 포기할 순 없었다.
10분 정도 쉰 후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유한대학교. 웅장한 모습이었다. 이와중에도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모두 피곤하고 쓸쓸해보였는데, 내가 대학원에 간다면 저런 느낌일까 싶었다.
시간이 남았다면, 대학교 내부에도 구경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그러나 어두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야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걷기만 했다. 사진도 찍은 힘이 없었고, 깊이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냥 지금까지 걸어온 관성 그대로 쭉 걸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아는 장소가 나왔다.
부천역이다.
벌써 저녁 8시가 넘었다. 이미 깜깜해진지 오래다.
오랜만에 온 부천역은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하하호호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친 내 모습과 대비되었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당기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점심을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어서, 모든 길거리 음식들이 맛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음식점에 들어가서 한 끼를 먹을 힘은 없었다. 그러면 정말 새벽 2시 넘어서 도착할 것 같았다.
조금 둘러보는데, 부천역 앞에 택시정류장에 택시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내 몸 안에 있는 천사와 악마가 나에게 속삭였다.
둘 다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5분정도 천사와 악마와 싸우려 시도해봤지만, 내가 졌다. 맨 앞의 택시에 올라탔다.
연수동에 간다고 하니, 자기는 연수동에 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뒷 차는 갈거니까 뒷차에 타라고 했다. 2번째 택시, 3번째 택시, 4번째 택시에 올라타봤지만, 모두 가기 싫다고 하였다.
보통 같으면 부천역 기사님들의 무차별 승차거부에 화날 법도 했지만, 어쩌면 이게 나에게 주는 메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이 포기하지 말라고 등을 토닥여주고 계신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 요즘 승차거부하는 택시라곤 찾아보기 힘든데, 4대나 연속으로 그런거면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야..!"
어느샌가 의욕이 넘쳐났다.
그래! 되는데까지 해보자
다시 걷기 시작했다. 4시간 30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계속 되뇌였다.
그러나 15분을 더 걸었을 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다리가 아파왔다.
머릿속에서는 포기해야 할 수많은 이유들이 떠올랐다.
부천의 한 대로에서, 포기를 결심했다.
비록 하느님은 승차거부를 통해 나에게 좋은 메세지를 주려고 하셨지만, 카카오느님은 1분만에 인근 택시를 배정해주셨다.
택시에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집에 도착해서도 12시간은 넘게 잤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무척이나 개운했다. 최근에 이렇게 깊이 잠든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제 5시간이나 걸어다녔던 일이 실제였는지 꿈인지 헷갈렸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택시비를 좀 아껴보려 5시간이나 걸어다닌 멍청한 사람의 이야기로만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 도전을 시도하길 정말 잘했다.
걷는 5시간 동안 뿐 아니라, 그 다음날까지도 새롭게 떠오른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1. 전역 후 걸어오는 도전을 해야겠다
걷는 것은 넓은 시야를 갖게 하고, 건강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꼭 전역날에 걸어와서, 전역 후 세상을 멋지게 살아가겠다는 마음가짐을 굳건히 하겠다.
2. 포기와 실패는 신체적 한계일 때보다, 정신적 한계에 도달했을 때 온다.
포기한 시점을 다시 생각해보면, 정신적 한계에 부딪혔었다. 처음 다짐들이 전혀 기억에 나지 않았고, 하지 말아야할 이유들만 한가득 떠올랐다. 두뇌가 나를 향해 계속 합리화의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 합리화의 메세지를 이겨내는 힘(그릿)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3. 새로운 동네를 걷는 것은 좋은 점이 많다.
새로운 길을 찾아 걷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모험이다. 외국에서 배낭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가면서 재미를 느꼈다.
한국의 거리가 다 비슷할 줄 알았지만, 하나하나 색다르다. 걷다보면 큰 다리를 건너갈 때가 생긴다. 그러면 걷는 사람은 나 밖에 없고 차만 쌩쌩 다닌다. 그 다리를 건너면, 결국 다음 동네가 나오는데, 그 마을은 또 분위기가 다르다. 바로 옆에 인접해있는데도, 전혀 다르다. 정말 신기하다.
4. 새로운 광경을 보고 다짐한 것들
처음보는 장소들이 많아 견문이 넓어졌다. 우연히 영등포구에 있는 클라이밍짐 내부를 보게되었는데, 너무나도 재밌어보였다. 다음에 꼭 가야지.
CJ 공장도 엄청 커서 압도감을 주었고, 고척돔 또한 그렇다. 다음에 고척돔에서 하는 경기도 보고 싶다.
5. 고민들이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휴가를 나오기 전 부대에서 문제가 생겨, 휴가를 다녀와서 내가 해결해야 했었다. 휴가 동안은 그 문제를 잊고 놀고 싶었지만, 아마도 내 두뇌 백그라운드에서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5시간 걸은 이후에는 더이상 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휴가 복귀한 이후에도 잘 대처했다. 아마도 걸으면서 나도 모르는 새에 어느 정도의 생각 정리를 끝냈던 것 같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몇달에 한번 정도는 해볼만하다.
다음은 8월이다. 다음에는 포기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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