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전

작은 용량 제품을 사야하는 이유

파크텐 2023. 7. 19. 09:40

얼마전 애프터쉐이브를 샀다. 내가 사고 싶던 제품은 클럽맨리저브 브랜디 스파이스이다. 네이버 쇼핑 상 가장 많이 노출되는 제품은 2만원짜리 177mL 제품이다.



그러나 난 50mL짜리 제품을 샀다. 배송비 포함 만원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내 소비를 보고 ‘돈이 아깝다’라고 말한다. 177mL가 가격은 얼마 차이 나지 않지만, 용량은 3배가 넘지 않냐면서 말이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주제는 이거다. 당신은 잘못된 소비를 하고 있다. 당신은 기업이 정한 소비 기준에 휩쓸리고 있다. 당신은 돈을 낭비하고 있다.


1. 왜 큰 용량일수록 단가가 쌀까?
기업의 입장에서는 용량이 3배 커진다고 해서, 들어가는 투입이 3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돈은 제품을 개발하고 마케팅하고 공장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 쓰인다. 애프터쉐이브 원액을 만드는 데에 쓰이는 돈은 극히 일부이다.

그러니, 큰 용량의 제품을 판매하면 이익도 커지니, 단가를 싸게 해도 기업은 이득을 볼 수 있다.

 


2. 그런데 왜 단가가 비싼 작은 용량의 제품이 단종되지 않을까?

작은 용량의 제품만을 소비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꾸준히 있기 때문이다. 단가가 비싼 제품을 사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보다 하나 더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높은 단가의 작은 용량이 오히려 더 싸다라고 인식하고 있다.
 

3. 그래서 대체 왜 작은 용량의 제품이 더 이득인건데?

 

내 과거 경험 상, 애프터쉐이브 50mL는 6개월은 족히 쓴다. 그러면 애프터쉐이브 50mL를 구입한다는건, 앞으로 6개월 간 면도를 하는 과정이 수월해지는 데에 가치를 지불하는 것이다. 그러면 177mL를 구입한다는건? 앞으로 1년 6개월 간의 면도 과정의 가치에 돈을 지불한 것이다. 결국, 6개월 이후의 1년의 가치를 미리 지불하는 데에 만원을 더 사용한 것이다.
 
미래의 행복에 현재의 돈을 쓰는 것은 틀렸다.
 

(1) 현재의 행복에 쓸 돈이 없다.

당신은 당장 이번달 사용하려는 가치에 쓸 돈이 부족해서 허덕이고 있지 않은가. 아낀 만원으로 당장 몇개월의 행복을 사는 것이 옳다. 어차피 돈은 더 벌 것이다. 당신은 분명 현재 사용할 돈이 더 있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돈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없어보이는 것이다. 6개월 이후의 애프터 쉐이브 비용에 돈을 쓰느라, 당장 수입에 도움되는 오프라인 강의를 못 듣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게 단지 애프터 쉐이브 하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이런식으로 돈이 줄줄 새고 있다.
 
역설적인 부분이 있다. 사람들은 신용카드를 쓰거나 대출을 받는다. 이는 미래의 내 돈을 끌어와 지금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돈으로 미래의 행복을 위한 소비를 한다.(?) 문제는 지금의 소비는 아무 죄책감이 없이 하고 있으나, 미래의 소비를 끌어다 쓰는 과정은 이자라는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냥 지금의 수입은 다 지금의 행복을 위해서 쓰고, 나중의 행복은 나중의 수입으로 지불하면 되지 않는가?
 
 

(2) 자유도(유동성)가 떨어진다.

자유는 곧 돈이다. 만약 애프터쉐이브를 몇달 써보니, 다른 향이 가지고 싶다면 어쩔텐가. 거의 쓰지도 못한 177mL를 버릴 것인가? 아마 대부분은 매몰비용의 오류에 빠지며 어쩔 수 없이 쓰던가, 눈물을 머금고 또다른 177mL를 살 것이다.
 
만약 애프터쉐이브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턱수염 탈모에 걸렸다 생각해보자.) 그러면 당장의 오프라인 강의를 남은 애프터쉐이브 몇방울로 지불할 것인가? 심지어 어디다가 팔수도 없다..
 
저축도 미래의 행복에 현재의 돈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유동성에 있다. 저축에 들어간 돈은 언제든지 현재의 가치 변환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대용량의 애프터쉐이브를 사는 것은 미래의 가치를 고정시켜버려, 유동성을 0로 만든다.
 

(3) 미니멀리즘과 최적화의 관점

물건의 개수를 제한하는 미니멀리즘 라이프스타일에서 보자면, 내 물건에 사용되는 나의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애프터쉐이브 대용량을 둔다고 얼마나 큰 에너지를 더 사용하겠냐 싶다만, 분명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할 것이다. 만약 그 물건이 큰 만족을 느끼는 제품이라면 오히려 좋은 에너지를 주겠지만, 물건은 존재 자체로 사람의 에너지를 조금씩 가져간다.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에 1바이트라도 더 들어오게 되면, 그것을 처리하는 데에 뇌가 사용된다. 크기가 크다면 눈에 잘 띌 테고, 몇년동안 누적해서 그 정보를 받아들인다면, 그 에너지는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된다.
 
그리고 최적화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큰 용량의 제품을 구매하면 공간을 낭비하고 힘을 낭비하게 된다. 어디다가 세워두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여행다니며 들고다닐 때는 더 무겁다. 내가 왜 1년 6개월 이후에 사용할 분의 용량을 지금 들고다녀야 하는가? 이는 마치 전역 컴퓨터를 1년 6개월 앞서서 육군훈련소에서 구매하는 것이다.

 

4.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작은 용량의 제품을 사지 않는가?

여러가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사회적 학습에 의해서 다양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큰 용량의 제품을 팔 수 밖에 없다보니, 마케팅과 세일즈의 부분에서 최대한 큰 용량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그래야만 세상이 현재의 규칙대로 돌아간다. 은행들은 더 돈을 벌고, 기업은 가치를 창출한다. 현재 사용되는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소비자에게 사용하게 함으로써 말이다. 그러니 사회의 분위기가 이러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구독 라이프

애프터 쉐이브를 예시로 들었지만, 이는 모든 소비에 마찬가지이다.
 
집은 비싸더라도 월세 중심의 집으로 산다. 전세의 보증금으로 묶여있는 동안 유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월세 집에서 살다가 형편이 안좋아진다면, 바로 다음달에 작은 집으로 이사하면 끝이다. 자유도가 올라갈 수록 위기에 대처하기가 쉬워지고, 나 자신에게 충실하게 투자할 수 있다. 또한, 당장의 수입이 당장의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삶의 의욕이 올라가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차나 시계, 카메라 같은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그런 곳에 돈을 투자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1~2년 후에는 그러한 물품들도 구독형 제품을 찾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삶 자체도 구독 경제이다. 삶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어차피 내 소유는 없다. 수많은 상호작용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현장에 있을 뿐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며 가치를 만들고, 그 가치로 다른 가치로 변환한다. 그리고 그것을 누린다. 끊임없는 자아실현과 가치 추구의 파도 속에서, 서핑하고 있을 뿐이다.
 
여정은 여정 그 자체로 즐겨야지, 거기에서 무엇을 소유하려고 하면 행복은 멀어질 뿐이다.